HJ PUREWAVE, 유럽의 신앙 유적지에서 역사의 숨결을 만나다
충북교구 퓨어워터 청년들이 지난 6월 30일부터 7월 17일까지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등 주요 역사·종교 유적지를 찾아가는 순례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일정은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를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현지 식구들과 교류하며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참가자들은 성지탐방과 기도·찬양, 버스킹, 현지 교류 등을 이어가며 책이나 영상으로만 접했던 역사를 자신의 경험으로 마주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피비린내 나는 핍박의 현장이자, 마침내 신앙의 자유가 찬란하게 공인된 심장부 로마에서 우리 순례의 첫 발걸음을 뗐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웅장한 돔 아래 섰을 때, 퓨어워터 청년들은 저마다 말을 잃었습니다. 어부 출신의 초라했던 한 사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나약한 베드로가 결국 이 자리에서 순교하여 오늘날 전 세계 신앙의 심장부가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이 결코 하늘의 섭리를 가로막을 수 없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1965년 8월 20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 오벨리스크의 남쪽 방면에 정해진 성지)


이어 바티칸 박물관을 찾았고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을 선출하는 시스티나성당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거장 미켈란젤로의 집념과 신앙심이 깃들어 있는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의 걸작을 통해서 예술의 경지로 신앙심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인간의 창조성의 무한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끝없이 이어지는 장엄한 예술과 조각품과 고대 문명의 역사적 유물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카톨릭 교황을 선출하는 시스티나성당,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및 최후의 심판)


(콜로세움에서 데스밸리 성염 정화 후 순교자를 향한 해원기도 정성)
그러나 퓨어웨이브 단원들의 마음은 그 화려함보다, 화려함의 뿌리가 된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붉은 피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콜로세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2천 년 전 이 거대한 원형경기장을 가득 메웠을 광기 어린 함성과 맹수의 포효를 떠올렸습니다. 그 끔찍한 한가운데서 오직 "예수는 나의 주"라는 한마디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의 마지막 숨결을 상상하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신앙의 자유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 위에 세워진 것임을 뼈저리게 자각했습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오직 예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숭고한 신앙을 지켜낸 그 순교자들을 위하여, 우리는 데스밸리 성염으로 이 자리를 정화하고, 그분들의 해원을 위한 기도 정성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찬양을 부르며, 2천 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 우리가 전하는 위로의 마음이 그분들의 영혼에 가닿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도미네 쿼바디스 교회, 예수님을 영적으로 만나뵙고 로마로 다시 발걸음을 돌린 곳)
우리는 또한 베드로가 로마에서 피신하기 위해 아피아가도 길로 도망을 가는 와중에 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쿠오 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물음이 던져졌던 도미네 쿠오 바디스 성당을 찾았습니다. 네로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도망치던 걸음을 돌이켰던 베드로의 그 자리에서, 퓨어웨이브 단원들은 저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뜨거운 성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로마 산 칼리토 카타콤베)
우리 일행은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의 캄캄한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차갑고 축축한 통로를 따라 걸으며, 평생을 이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도 오직 하늘만을 찬양하며 죽어간 초대 교회 성도들의 숨결이 지금도 벽 틈 사이로 스며 나오는 듯했습니다. 그 앞에서 퓨어워터 청년들은 '데스밸리 성염'을 두 손에 쥐고, 2천 년 세월 동안 풀리지 못한 채 어두운 지하에 머물러 있었을 억울한 넋들을 성별하며 뜨거운 눈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목소리 낮춰 부른 찬양이 지하 무덤의 벽을 타고 울려 퍼질 때, 어둠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던 그들의 신앙이 오늘 우리의 심령 속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듯한 벅찬 은혜를 체휼하였습니다.

(산 칼리토 카타콤베 , 아피아가도에서 기독교 순교자를 위한 찬양 기도회)


(베드로와 바울이 투옥되었던 마메르티노 감옥)

(마메르티노 감옥 안 사도 바울과 베드로 기념상 앞에서 PUREWAVE 단원들과)

(산 조바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부속건물 산타 스칼라, 예수님이 고난을 받기 위해 올랐던 빌라도 법정 계단을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무릎기도정성으로 한계단씩 오르는 퓨어워터 청년 )
2. 스위스 (제네바) — "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 (Post Tenebras Lux)" 종교개혁의 심장부를 걷다!
성 피에르 성당, 종교개혁 박물관, 칼뱅묘지, UN 유럽본부, 인터컨티네탈호텔, 제네바 가정연합 센터

(이탈리아에서 스위스 제네바로 넘어가는 몽블랑 터널 앞에서 기념촬영)
제네바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이 태동한 곳은 비텐베르크였지만, 그 불길을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키고 개신교 신학의 뼈대를 완성한 곳은 다름 아닌 제네바였습니다. 우리는 루터가 씨앗을 뿌린 자리에 그 씨앗이 어떻게 조직된 신앙 공동체로 뿌리내렸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이 도시를 찾았습니다.

( 존 칼뱅, 종교개혁가, 기독교강요 출간으로 개신교회 신학 정립에 영향 )
16세기 중반, 제네바는 '개신교의 로마'라 불릴 만큼 종교개혁의 실질적인 중심지로 성행하였습니다. 루터파의 발상지가 비텐베르크였다면,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박해를 피해 몰려든 개혁 신앙인들이 마지막으로 모여든 곳이 바로 제네바였습니다.
프랑스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했던 장 칼뱅은,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끌던 기욤 파렐의 강권으로 1536년 제네바에 정착하게 됩니다. 장 칼뱅은, 본래 조용히 은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하고 싶은 학자였습니다. 그가 제네바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욤 파렐은 급히 칼뱅이 묵고 있던 여관으로 달려가 종교개혁에 함께해 줄 것을 간곡히 청했습니다. 그러나 칼뱅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며 이를 거절했습니다.

(칼뱅을 설득하여 종교개혁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조력한 기욤 파렐)
그러자 파렐은 불같이 외쳤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그대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한, 나는 하나님께서 그대의 휴식과 공부를 저주하시길 바라오!" 그 서슬 퍼런 외침 앞에서 공포에 떨던 칼뱅은 결국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제네바에 정착하여 종교개혁에 투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화 앞에서 우리 퓨어워터 청년들은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중심에는 칼뱅이라는 한 인물만이 아니라, 그를 하늘의 부르심 앞으로 끌어낸 파렐이라는 동역자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홀로 빛나는 위인은 없으며, 누군가의 절박한 부르짖음과 동역이 있었기에 한 사람의 순종이 역사를 바꾸는 물결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새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참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나아가는 이 길 역시, 서로가 서로를 하늘 앞으로 끌어당기는 동역자가 되어줄 때 비로소 더 큰 섭리의 물결로 완성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칼뱅은 이 도시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 공동체로 재편하고자 엄격한 신앙 규율과 도덕적 질서를 세웠습니다. 그의 신학과 저작, 그리고 제네바 아카데미(오늘날 제네바 대학교의 전신)를 통해 배출된 수많은 목회자들이 프랑스의 위그노,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그리고 훗날 영국 청교도 신앙에까지 이르는 개혁주의 신앙의 뿌리를 이루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정착이 대륙 전체의 신앙 지형을 바꿀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네바 성 피에르 성당, 칼뱅 목회지)

(성 피에르 성당, 칼뱅이 평생 쓴 의자 앞에서)

(성 피에르 성당은 카톨릭시대 조각상과 제단화 장식을 배제, 오직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 예배 지향)
우리는 먼저 성 피에르 성당을 찾았습니다. 본래 12세기에 가톨릭 성당으로 세워졌던 이곳은 1535년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로 전환되어, 칼뱅이 직접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했던 제네바 개혁교회의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소박하다 못해 다소 엄숙한 내부는 화려함을 철저히 배제했던 칼뱅주의 신앙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었고, 지금도 그가 앉았던 의자가 보존되어 있어 마치 그의 숨결이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성당 지하의 고고학 유적지에서는 4세기 초대 교회의 흔적까지 발견할 수 있어, 이 자리가 수천 년에 걸쳐 끊임없이 하늘을 찾아온 신앙인들의 자리였음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바스띠옹 공원 종교개혁 기념비 앞에서 그 정신을 기리는 퓨어웨이브 단원)
이어 종교개혁 박물관과 바스티옹 공원의 종교개혁 기념비 앞에 섰습니다. 거대한 돌벽에 새겨진 'Post Tenebras Lux(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라는 문구는 벼락처럼 가슴을 쳤습니다. 부패한 교회의 어둠을 뚫고 진리의 빛을 찾고자 했던 개혁가들의 치열함은, 작금의 차가운 핍박 속에 놓인 우리 가정연합의 현실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 십자가의 고난 한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 된다면 이 시련은 마침내 찬란한 승리의 빛으로 역전될 것임을 확신하며 순수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존 칼뱅의 묘 앞에서)
우리는 또한 시립묘지에 자리한 칼뱅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무덤이 훗날 순례와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비석조차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로 인해 이름이 적힌 작은 표석만이 후대의 존경을 대신 전하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기념비 하나 남기지 않은 그 철저한 겸손 앞에서, 퓨어워터 청년들은 진정한 신앙의 거인이란 자신을 드러내는 이가 아니라 오직 하늘의 영광만을 남기고자 하는 이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 소박한 자리 앞에 둘러서서, 오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종교개혁의 정신을 겸허히 이어받겠다는 마음으로 존경 어린 기도 정성과 찬양 기도를 올렸습니다. 목숨을 걸고 진리를 지켜낸 그 헌신에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우리 역시 세상의 인정이 아닌 오직 하늘의 뜻만을 좇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스위스협회장님을 따라 가정연합 센터를 방문하여 잠시 말씀을 듣고, 스위스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지 활동을 공유받으며 소감을 나누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협회장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직접 성 피에르 성당과 종교개혁 기념관, 칼뱅의 무덤, 그리고 UN 유럽본부와 인터컨티넨탈 호텔까지 손수 안내해 주셨습니다. 낯선 땅을 찾은 우리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동행해 주신 그 정성 앞에서, 우리는 국경을 초월한 식구 사랑의 진심을 깊이 체휼하며 진심 어린 감사를 느꼈습니다.


(유럽 UN본부 앞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전쟁종식과 종교자유를 위한 한마음)

(2006년 7월14일, 제네바 인터컨티네탈호텔에서 개최된 UPF 행사 )


(스위스협회장님께 감사의 부채 선물 전달)
제네바 인터컨티넨탈 호텔 현장에서도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나누었습니다. 세계 최강 공산권의 심장부와도 같은 소련 대사관을 코앞에 두고, 오히려 그 옆자리에서 "공산주의는 반드시 종언을 고할 것"이라는 예언적 선언을 세계 석학들의 입을 통해 터뜨리게 하신 담대한 섭리적 포석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전략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댄버리 수난이라는, 가장 낮고 고통스러운 자리에 계셨던 바로 그 시기에 오히려 세계 냉전 구도를 뒤흔드는 담대한 승부수를 던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자랑스러운 섭리적 사건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카플란 박사와 같은 세계적 석학들의 결단을 통해, 종교 지도자의 비전이 실제로 국제정치의 흐름까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역사의 현장에서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며 벅찬 감격을 나누었습니다.
몇 년 뒤 실제로 소련제국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되는 세계사적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되새기며, 우리 퓨어워터들은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역시 언젠가 역사가 증명할 또 하나의 섭리적 현장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3. 독일 (보름스, 비텐베르크, 베를린) 거대한 교권 앞에서의 결연한 마르틴 루터의 사자후!
- 보름스대성당 루터 종교개혁 기념비 / 성모 마이라 시립교회, 루터의 집, 성 비텐베르크 교회 /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장벽, 찰리 체크포인트, 학살된 유럽 유대인 추모 기념비
우리는 독일로 향했습니다. 신앙의 양심을 걸고 역사의 흐름을 뒤바꾼 마르틴 루터의 생애를 따라 걸으며, 퓨어워터들은 진리 앞에서 목숨을 걸었던 한 인간의 결단이 오백 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온몸으로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보름스 제국회의 황제 앞에선 마르틴 루터)
독일의 첫 행선지는 보름스였습니다. 1521년 신성로마제국 카를5세 황제가 소집한 제국회의가 보름스대성당에서 열리게 되었고, 황제와 교황, 그리고 시대 전체 앞에 선 한 청년 마르틴루터 수도사는 종교재판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한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루터의 그 떨리는 목소리가 시공간을 넘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는 듯했습니다. 거대한 교권의 억압 앞에서도 오직 진리 하나만을 붙들고 죽음조차 불사했던 그 결연한 용기는, 우리 축복가정과 퓨어워터 세대에게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퓨어웨이브 단원들은 저마다 마음속으로 "나는 오늘 이 시대 앞에 무엇을 걸고 서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그 물음 앞에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루터의 종교재판이 있었던 보름스 대성당 벽화 앞에서)

(보름스 루터 종교개혁 기념비 앞)

(루터가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파문 칙서를 받고 그 문서를 불태운 떨기나무 공원)

(루터가 1512년 담임목회자로 시무했고, 최초의 독일어 개신교 예배거 거행된 성모마리아 시립교회)
이어 루터가 1512년부터 담임 목회자로 시무하며 대부분의 설교를 전했던 비텐베르크시의 성모 마리아 시립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1521년 독일어 최초의 개신교 예배가 거행된 곳이며, 평신도에게 빵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는 성찬식도 이곳에서 처음 시행되었기에 ‘종교개혁의 모교회’로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회중 성도들의 시선이 말씀을 전하는 성직자가 아닌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화)

성직자들의 언어에 갇혀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비로서 평범한 백성의 언어로 선포되던 그 순간을 우리는 이 낡은 회중석 사이에 서서 상상해 보았습니다.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신앙이 만민의 것으로 돌아오는 역사적 전환점이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 퓨어워터 청년들은 진리란 소수의 것으로 갇혀 있어서는 안되며, 언젠가는 반드시 모든 이의 언어와 삶 속으로 흘러 들어가야 한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모교회’라 불리는 이 자리에서 우리의 가치 역시 세상 모든 이의 심정의 언어로 번역되어 민민에게 닿는 날을 소망하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95개조 반박문이 붙여졌던 성 비텐베르크 교회)
이어 우리는 95개조 반박문이 붙여졌던 비텐베르크 성 교회를 순례하였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이 작은 시골 마을의 교회 정문에 한 무명의 수도사가 못으로 박아 붙인 종이 한 장이 훗날 유럽 전체의 정신사를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의 시작이 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지적한 이 95개조 반박문은 삽시간에 인쇄술을 타고 독일 전역과 유럽 대륙으로 퍼져나갔고, 천년 넘게 견고했던 교황권의 근간을 뒤흔드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95개조 반박문이 붙여졌던 것을 기념하는 청동 기념문)
이 일로 루터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고 파문당했으며, 그는 세상의 권위가 아닌 오직 자신의 양심과 성경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선택했습니다. 이단자로 낙인찍혀 목숨이 경각에 달린 도피 생활 중에도, 그는 당시 오직 라틴어로만 허락되어 사제들의 특권으로 독점되어 있던 성경을 처음으로 독일어로 번역해 내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성경이 사제 계층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평범한 백성의 언어로 옮겨지는 그 순간, 신앙은 비로소 소수의 손에서 만민의 것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번역 작업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접근권 자체를 뒤바꾼 조용하지만 강력한 혁명이었습니다.

(성 비텐베르크 교회에서 종교개혁가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기도정성 및 결의)
루터의 소박한 강단, 손때 묻은 책상 위에서 시작된 이 결단은 결국 개혁교회를 향한 거대한 혁명의 불씨가 되어 유럽 전체의 정신사를 뒤바꾸는 물결로 번져나갔습니다. 위대한 개혁이 결코 화려한 궁전이나 큰 무대에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 퓨어워터 청년들은 오늘 우리 각자의 작은 신앙의 자리, 작은 기도의 자리,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 작은 순종의 걸음 역시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 비텐베르크 교회 안에 있는 마르틴 루터의 무덤)
이단이라는 정죄와 파문의 위협 앞에서도 양심의 소리를 따랐던 한 사람의 용기가 결국 역사를 바꾸었듯, 역시 세상의 오해와 냉대 속에서도 우리공동체를 지켜내는 담대한 퓨어워터 세대가 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냉전의상징이자 인류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 앞에서 기도정성)
다음 행선지, 베를린 장벽 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걸음은 자연히 멈춰 섰습니다. 냉전의 상징이자 인류 분단의 상처였던 그 차갑고 낡은 벽돌들 앞에서, 우리는 월드카프 문효진 회장의 포효와도 같은 메시지와 눈물의 기도를 마음 깊이 상속받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987년, 아직 이 장벽이 견고하게 서 있어 그 누구도 붕괴를 확신할 수 없었던 그때, 문효진 회장의 연설을 통해서 공산주의는 거짓이며, 공산주의로 인해 고통받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사랑으로 평화세계를 이룩할 수 있음을 강하게 대중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2년 뒤인 1989년, 그 견고해 보이던 장벽이 실제로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 앞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리적인 콘크리트 장벽은 이미 무너졌지만, 오늘날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이념과 미움, 오해와 분열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사람과 사람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를 갈라놓고 있음을 절감하였습니다. 결국 참사랑만이 콘크리트보다 더 견고한 그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자리에서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특히 아직도 허리가 잘린 채 남아 있는 우리 한반도를 떠올리며, 퓨어워터 청년들은 이 장벽 앞에서 참사랑의 실천만이 모든 물리적·사상적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찰리 체크포인트를 찾은 존 F. 케네디)

(찰리 체크포인트 검문소 앞 기념사진)
찰리 검문소에서 우리는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뜨겁게 불렀습니다. 이념의 벽 앞에서 목숨을 걸고 자유를 향해 넘어왔던 이들의 발자취가 서린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늘부모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을 이루는 시대의 주역이며, 갈라진 한반도를 하나로 잇는 평화통일의 역군으로 부름받은 존재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브란텐부르크 문 앞에서 독일 협회장님 사모님의 해설 가이드 경청)